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이 공개됐다. 7개국에서 TV쇼 부문 1위에 오르는 등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작년 비슷한 기간에 등장해 전 세계적 열풍을 몰고 온 ‘오징어게임’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필자 역시 추석 연휴 기간을 이용해 시청을 마쳤다. 350억 원이 투입된 대작답게 보는 재미는 있다. 하지만 무언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감독과 배우, 물량공세가 주는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인지 헛헛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는 넷플릭스 콘텐츠가 전반적으로 주는 느낌과 흡사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수리남을 통해 느낀 넷플릭스 콘텐츠의 아쉬운 점들을 정리해봤다.
※본 콘텐츠에는 넷플리스 드라마 ‘수리남’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건 어디서 봤더라…’ 식상함을 넘은 기시감
이 드라마를 보게 된 건 딱 세 가지 이유였다. 윤종빈이라는 감독과 추석 연휴의 여유, 그리고 350억원이나 들었다는 제작비에 대한 호기심이다. 사전에 알고 있었던 정보도 거의 없었다. 실화 기반이라는 것도 몰랐고, 마약이 주 소재인 것도 몰랐다.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던 시청은 극을 끌어가던 몇 가지 주요 소재들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마약, 국정원, 이중간첩 같은 것들이다. ‘아, 또 이런 얘기였어?…’라는 생각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2회 중반까지 봤을 무렵부터는 앞으로 전개될 그림들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뜬금없이 등장한 교회가 악의 소굴이고 목사가 최종 빌런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사실 내용에 대한 식상함을 지적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모든 내용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니 말이다. 시청을 끝내고 해당 내용을 접하며 ‘수리남에서 진짜 영화 같은 일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사건의 전개 방식이나 캐릭터에 대한 식상함도 내용 못지않다. 어디서 본 듯한 주인공들이 어디서 들은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몰입도가 떨어졌다. 영화 ‘아수라’와 영화 ‘신세계’ 속의 주인공 말투를 섞어 쓰는 황정민의 자기복제 연기는 그중에서도 백미다. 마침 바로 전에 봤던 넷플릭스 작품이, 온갖 스파이물의 폼 나는 장면만 짜깁기한 것 같은 ‘그레이맨’이었다 보니, 사무치는 식상함이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 영화와 드라마 사이 그 어딘 가의 어중간함…
식상함은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며, 장르적인 ‘클리셰’ 또한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수리남을 보면서 진짜 아쉬웠던 부분은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어중간한 밀도다.
영화는 상징과 함축의 묘가 빛나는 장르다. 두 시간 여 안에 세계관을 설명하고 그 속에 몰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보다 대사가 훨씬 중요하다. 주인공들의 표정 하나, 대사 한 줄이 영화 전체의 철학을 오롯이 표현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드라마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읊어줄 시간이 충분하다. 그래서 드라마의 세계관과 캐릭터에 몰입하면 훨씬 충성도를 갖는 애청자가 된다. 예전 ‘다모폐인’ 같은 게 생기는 원리다.
총 6회 차 구성의 ‘수리남’은 한편 한편의 만듦새가 영화를 방불케 한다. “6시간짜리 영화 같다”는 감상평도 적지 않다. 도미니카에서 찍었다는 로케이션은 풍부하고, 총격전이나 추격전의 스케일도 화려하다. 장르의 특성상 손에 땀을 쥐는 서스펜스도 있다. 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만큼 연기의 빈틈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영화 같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든다. 앞서 언급한 상징과 함축, 삭제의 묘가 별로 필요치 않다 보니, 전개가 너무 느슨하고 자연스레 극의 리듬도 떨어진다. 주인공인 하정우의 과거사에 모든 분량을 할애하는 1화를 볼 때는, 마치 지하철 옆 자리의 통화를 듣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알 필요 없는 얘기를 억지로 듣고 있는 느낌 말이다.
윤종빈 감독이 ‘디테일’에 강하고 ‘클리셰’를 가지고 논다는 평가를 받는 감독이기에, 이 부분이 더 아쉽다. 감독의 전작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마동석이 연기한 ‘김서방’이란 캐릭터가 나온다. 우리는 그 캐릭터의 과거사를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김서방이 현역 건달들 앞에서 “나, 운동한다”며 발차기 시늉을 하는 것만 봐도, 그 캐릭터가 적당히 순진해 뵈지만, 허풍·허세·허당의 3요소가 다분하다는 걸 알아차린다. 발동작 하나에 캐릭터에 입체감이 생기는 것이다. ‘수리남’에는 그런 캐릭터가 없다. 다들 말이 많고, 심지어 중언부언한다.
이야기가 늘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밀도가 떨어진다. 작중 언더커버인 것이 밝혀진 조우진과 하정우가 적의 아지트 한 복판에서 오순도순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언더커버의 이야기를 꽤 진지하게 그렸던 JTBC드라마 ‘무정도시’를 보면 20회 차에 이르는 장대한 이야기임에도 저런 느슨함을 찾아볼 수 없다. 어릴 때 유도 조금 배우고 제이슨 본처럼 액션 무쌍을 펼치는 모습, 미군 상대로 카센터 몇 년 하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과 자유자재로 소통하는 모습 등도 ‘디테일’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감독의 작품이라기엔 아쉬움이 있다. 여담이지만, 하정우 연기는 조금 이상해진 것 같다. 그의 특기였던 ‘능청스러움’이 어느 때부터인가 ‘진지하지 못함’으로 느껴진다.
| 넷플 오리지날에 대한 배신감… 이렇게 양치기 되나
‘수리남’은 그냥저냥 볼만 했던 명절 연휴 킬링타임 용 드라마였다. 재미가 없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돈 쓴 티가 팍팍 나는 화면과 멋진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수리남’이란 나라를 새로 알게 된 것도 좋았다. 정작 수리남에선 자국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고 불만틀 토로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전에 싱크로율 높은 실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으면 아마도 더 재미있게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문제는 너무 컸던 기대 탓일 것이다. 오픈 전부터 ‘역대급’이란 수식어가 달린 광고 문구를 수차례 봤고, 올해 최고작이란 후기들도 즐비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본 작품은 그저 그렇게 볼 수 있는 한국영화 정도였다. 똑같이 실화를 바탕으로 사기범죄가 등장하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경찰과 언더커버의 합동작전을 그렸던 영화 ‘마스터’가 생각나는데, 딱 그 정도의 재미다.
큰 기대가 무너지면, 같은 크기로 기대하기 힘들다. 최근 넷플릭스의 고전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올해 선보인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카터’, ‘서울대작전’ 같은 작품들 역시 군불만 지피다 소리 없이 식어버렸다. 때 마침 들려오는 오징어게임의 에미상 수상(작품상, 주연상) 소식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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