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배우에게서 처음 받았던 인상은 ‘심심함’이었습니다. 배우치곤 외모도 개성도 그저 평범하다는 느낌이었죠. 하지만 이내 그 진가가 드러났어요. 평범함이 빚어내는 비범함에 흠뻑 빠져들었죠. 5년 전 오늘 세상을 떠난 고 김주혁 배우 이야기입니다.
2017년 가을이 깊어질 무렵, 비보 하나가 날아들었습니다. 배우 김주혁 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내용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필자에게도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김주혁이란 배우의 진가를 서서히 알아차리며 그가 써 내려갈 필모그래피를 잔뜩 기대하고 있던 때였으니까요. 마침 그가 출연했던 ‘석조조택 살인사건’을 보고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접한 소식이었어요.
벌써 5년 전의 일이네요. 지금도 우연히 김주혁 배우가 얼굴을 비쳤던 작품들을 접할 때면, 그때 느꼈던 그 황망함과 안타까움이 어렴풋 기억날 정도입니다. 그와 작별한 5년 전 오늘을 추억하며, 필자에게 너무도 인상 깊었던 김주혁 배우의 연기와 열정을 돌이켜보려 합니다.
chap 1. 백지의 묘미는 무엇이든 채울 수 있어서다.
지난 2015년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따뜻한 성장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죠. 관전 포인트가 많은 드라마인데, 그 중에 하나가 ‘미래의 남편 맞추기’였어요. 또래 친구들 중에 훗날 누가 여주인공의 남편이 될지 맞추는 건데, 예상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죠. ‘어차피 남편은 OO이다’라는 말을 줄여 ‘어남택’, ‘어남류’ 같은 유행어가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극중 미래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배우가 바로 김주혁이었습니다. 필자는 그 캐스팅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누구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얼굴, 담백하고 심심하기까지 한 배우의 이미지가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김주혁 배우의 첫인상이 꼭 그랬습니다. 첫 주연작이었던 ‘싱글즈’(2003)부터,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4), ‘광식이 동생 광태’(2005)까지 3년에 걸친 작품들에서의 모습은 그저 크게 흠잡을 곳 없이, 적당히 매력 있는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배우의 그것이었죠. 얼굴 자체가 클리셰인 느낌이랄까요?
이미지처럼 연기도 그저 평범하다싶었어요. 가끔씩 유독 귀엽거나 섹시하게 느껴지는 매력이 있긴 했지만, 그건 배역의 매력일 뿐 배우의 매력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죠. 공교롭게도 유명 배우의 아들 출신이란 배경까지 알고 나자, ‘아버지 입김으로 주연을 따냈나?’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죠.
10년 정도 지났을까…첫인상에 갇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배우를 다시 보게 된 작품이 있었어요. ‘비밀은 없다’(2016)라는 영화였죠. 금세 몰입하게 만드는 스릴러 작품이었는데, 김주혁 배우가 충격적 진실을 품고 있는 정치인으로 등장했죠. 영화의 내용도 파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배우의 이미지 변신이 인상 깊었어요. 선하다 못해 맹한 인상으로 기억했던 김주혁 배우는 누구보다 비정하고 야비한 모습으로 분했죠. 흥미로운 건, 그게 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예전에 기억했던 귀엽고 때론 느끼한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어요. 배우에게 연기 변신은 옷 갈아입듯 빈번한 일이지만, 연기가 변신한 게 아니라, 얼굴이 변신한 것 같은 배역 일체감이었어요. 다소 밋밋해 뵈는 백지 같은 얼굴이 배우에겐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절감할 수 있었죠. 기분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그새 연기도 엄청 늘은 것 같았고요.
영화를 고르는 기준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필자에겐, 그때부터 김주혁 배우의 이름이 의미를 더했습니다. 이후 ‘공조’(2017), ‘석조저택 살인사건’(2017), ‘독전(2018)에서의 악역이 인상 깊었던 건, 단순히 피지컬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원래 백지 같은 이미지의 배우에게서 나오는 악의 아우라가 현실감을 배가 시켰던 거예요. 평범했던 한 인물이 악에 물들게 되는 과정, 개인의 역사, 사연이나 명분 같은 것이 배역에 스며드는 느낌이었죠. 악을 위한 악이 극의 개연성을 해치고, 몰입감을 저해한다는 면에서 김주혁 배우의 진가가 발휘되는 셈입니다.
| 은은하지만 치열했던 고민들, 그렇게 명배우로 떠나다
유명 배우의 자녀가 배우로 성공한 경우, 의례 생기는 선입견들이 있어요. ‘피를 물려받았으니 별 고민 없이 연기자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남들보다 덜한 노력으로 더 많은 대우를 받을 것’이란 의혹도 갖게 되죠.
그런데 적어도 김주혁 배우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김 배우의 아버지는 고 김무생 배우입니다. 40여 년 동안, 때론 엄하게 때론 다정한 모습으로 안방극장에 감동을 안겼던 베테랑 배우였죠.
하지만 김주혁 배우의 연기 인생은 아버지와 별로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김무생 배우는 아들이 연기 활동을 하는 걸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하며, 김주혁 배우 역시 학창시절 내내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고 하죠.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라 딱히 연기자의 꿈을 꿀 수도 없었고요.
그런 그가 어떤 운명에 이끌려 결국 배우의 길로 들어섰으니, 그가 품었던 고민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을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아버지가 반대했던 길이니 큰 도움을 기대하기도 힘들었을 테고요.
실제로 그의 인생은 연기에 대한 고민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학을 연극영화과로 진학한 후에는 표현에 인색한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아예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을 정도라네요. 졸업 후에는 연극 극단에서 1년 이상 수련을 쌓기도 했죠. 우여곡절 끝에 방송사 연기자 공채에 합격했지만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영화 ‘싱글즈’ 때의 나이가 32살이었으니, 배우로 치자면 굉장히 늦은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후 3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꿰차며 존재감을 만들기는 했지만 이 역시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고전하며 기나긴 쓰라림도 겪었죠. 그런 시간들이 결국 백지에 다양한 스케치와 색감이 아로새겨지는 과정이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2014년부터 TV 예능에 출연하기 시작하며 친근하고 털털한 이미지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다져진 내적 성취들을 우리가 직접 확인했기에, 그의 갑작스런 비보는 더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이제부터 정말 보여줄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배우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부족했던 건 아닙니다. 보여줄 것이 훨씬 더 많았던 게 사실이지만, 이미 보여준 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좋은 배우였으니까요. 오늘 밤은 개인적으로 꼽는 그의 인생작 ‘석조저택 살인사건’을 한 번 더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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