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26일이면 떠오르는 게 있죠. 바로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입니다. 그런데 필자에겐 장면이 먼저 펼쳐지네요. 영화 ‘그때 그 사람들’ 말입니다. 블랙코미디의 진수였던 작품, 꽤나 인상 깊었죠. 영화를 통해 블랙코미디 장르를 톺아봅니다.
‘블랙코미디’는 코미디를 비틀어 불편한 웃음을 선사하는 장르입니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코미디의 원칙을 대놓고 파괴하죠. 가장 쉽게 불편을 야기하는 방법은 현실성을 대입하는 것이에요. 딴 세상 얘기는 마음 편히 웃어넘길 수 있지만, 그게 내 얘기, 우리 얘기가 되는 순간, 쓴웃음으로 변하죠. 누군가는 불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블랙코미디가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는 이유입니다.
부조리, 자학 같은 방식을 주로 쓰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건 역시 ‘풍자’죠. 예전 유행했던 코미디쇼에서 정치인들을 소재로 했던 코너들이 바로 현재의 불편한 상황들을 익살스럽게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의 전형입니다. 이런 코미디를 보며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웃음은 냉소뿐이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블랙코미디의 수작 ‘기생충’을 보면 이 장르의 작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 중에서 나온 빈집 음주 장면이 대표적이죠. 주인 없는 집에서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먹고 즐기던 주인공들이 집주인 가족의 예기치 않은 등장에 거실 테이블 밑으로 모습을 감추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 여기까지는 그냥 코미디죠. 상황도 흥미롭고 행동도 익살스럽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집주인은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면서 “가끔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라고 덧붙입니다. 비현실적이었던 스크린 속 얘기가 갑자기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이내 씁쓸한 기분마저 들죠. 서릿발 같이 차가운 현실에 다분히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웃습니다. 블랙코미디가 완성되는 순간이죠.
영화 ‘그때 그 사람들’도 비슷한 향기를 풍깁니다. 우리네 정치사의 비극을 마음껏 뒤집어 까며 벌이는 한바탕 소동극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씁쓸한 여운을 남기죠.
chap 1. 보는 사람을 피식거리게 만드는 부조리의 향연
흔히 10‧26사태라 불리는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 무겁고 엄중한 역사의 비극이었습니다. 배경적 지식은 차치하고 현상만 보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를 영화화한다는 사실만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죠.
영화가 “영화 내용은 모두 픽션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상황이 어떤 역사적 사실을 그려낸 것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실제로 고 박정희 대통령의 가족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면서, 영화의 일부 장면이 수정되거나 삭제되기도 했죠.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의해 영화 장면이 삭제된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묵직한 소재를 다룸에도 영화 속 주인공들의 언행은 시종일관 가볍습니다. 심지어 그 ‘사건’을 대함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 ‘거사’를 도모하기 전 주인공인 중앙정보부 주 과장은 부하 몇몇을 앞에 두고 “너 군대 어디 나왔냐?”라고 묻죠. 얼떨결에 대통령 암살 사건에 가담하게 된 직원은 “아, 뭔 운짱한테 이런 걸 시키냐”며 끌탕하고요. 헌정 사상 처음 발생한 희대의 사건이 매우 감정적이고 즉흥적으로 일어났다는 암시나 다름없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동기나 목적의식을 마주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인생처럼, 그저 한 발짝 떨어져 웃기는 사람들의 웃기는 해프닝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죠.
암살 현장이었던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따르던 여자들은 사건 발생 후 따로 격리된 방안에서 “난 이것들이 무슨 쇼하는 줄 알았잖아”라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듭니다. 이 대사가 이 영화의 주제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대통령의 시신을 마주한 부총리는 마치 흥미로운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이일을 김일성이가 알면 어떻게 할까?”라고 말하죠. 매 순간 맥이 푹푹 빠지는, 그야말로 부조리의 향연입니다.
| 동기와 목적 따윈 잊게 만드는 ‘바보들의 합창’
영화는 이런 상황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치밀하지 않은 사건의 나열이 오히려 치밀하게 부조리를 드러내죠. 극 중 주 과장은 “오늘 우리 인생 쇼부 한번 치자”는 말로 행동을 개시하지만, 인생을 건 ‘쇼부’라고 하기에는 사전 준비도 사후 대처도 엉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막판에는 “사람이 왜 그리 성급해 우리가 뭐 죄 졌어?”라는 말도 하죠. 영화 내내, 사람을 죽이고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판단할 정도의 명분과 당위성을 보여줬던가요? 이는 그 자체로 당시 정치 상황과 사건 당사자들의 불합리성과 부조리함을 맹렬히 비판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겁니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을 완벽히 다른 시선으로 그려낸 영화 ‘남산의 부장들’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표방하죠. 폭력적인 주제에 대해 굉장히 냉철하고 비정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화면도 건조하고 화법도 묵직하죠. 이 영화에선 영화 시작부터 그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차근차근 쌓아 올립니다. 의심으로 시작되어 확신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내밀히 따라가면서 이내 폭발시키죠.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의 목적, 즉 국가 대내외적인 목적과 개인적인 목적이 완벽히 결합되는 순간 방아쇠가 당겨집니다. 해당 사건의 동기와 목적에 보다 집중하는 거죠.
하지만 ‘그때 그 사람들’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성보단 감정을 앞세운 주인공들은 되는 대로 행동하고, 상황도 그저 아무렇게나 흘러가죠.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명분도 없습니다. 우왕좌왕하며 “총 가져와 총!”이라고 외쳐대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중에서도 백미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같은 사건의 당사자인 주인공이 두 영화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실제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내뱉는 대사도 완전히 다르죠.
‘남산의 부장들’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입니다. 아픈 역사의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아주 정성스레 넘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더 몰입했고, 더 오래 기억에 남았던 건 ‘그때 그 사람들’입니다. 이는 어쩌면 실제 그 역사의 현장이, 그렇게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 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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