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콘텐츠 위스퍼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을 통해 본 좋은 글의 조건

by 습자 2022. 11. 20.

“국민의, 국민의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할 것이다.”로 기억되는 희대의 스피치,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이죠. 159년 전 오늘 있었던 역사상 최고의 연설문을 통해 좋은 글을 조건을 톺아봅니다. 

해당 연설이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던 것인지 잘 모르는 분이라도, ‘국민의, 국민의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는 펀치라인은 꽤 익숙하실 겁니다. 백여 년 동안 수많은 인용과 패러디를 통해 접했으니까요. 실제로 해당 연설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라고 하죠. 

연설의 배경을 살짝 살펴볼까요? 때는 바야흐로 1863년,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였어요. 미국 입장에선 가장 어려운 때였죠. 일종의 ‘내전’이었고, 역사상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이었으니까요. 지난했던 전쟁의 한 복판, 그리고 가장 치열한 전장인 ‘게티즈버그’라는 두 가지 조건은 연설의 무게감을 더했어요. 전쟁에 대한 명분으로 지쳐가던 국민들을 독려하는 동시에 희생자에 대한 추모까지 담아냈죠. 

묵직한 역사성과 감동적인 내용만큼, 관심을 끄는 건 콘텐츠로서의 완성도입니다. 당시 만해도 “대통령 연설 치고는 너무 세련되지 못하다”라면서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고 해요. 시카고 타임즈는 “어리석고 밋밋하고 싱거운 연설”이라고 혹평했답니다. 원래 링컨 대통령은 말투 자체가 꽤 투박했던 것으로도 유명하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연설은 재평가를 거듭하게 됩니다. 현학적인 것이 최고라고 칭송받던 당시와는 달리, 현대로 접어들며 명징하고 직관적이며 매끄러운 문장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죠. 도대체 게티즈버그 연설의 정확히 어떤 면이 좋은 글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일까요? 

 

링컨-대통령이-게티즈버그-연설을-하고-있는-그림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로 꼽힌다.

 

chap 1. 좋은 콘텐츠의 절대 조건, 가독성을 높여라!

게티즈버그 연설을 칭찬하는 말 중에는 ‘선구적’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뜻이죠. 그도 그럴 것이 1800년대 중반 지식인들은 말을 굉장히 길고 어렵고 화려하게 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하네요. 하긴 고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동서양 할 것 없이 양반이나 귀족들의 말은 쓸데없이 거추장스럽고 장황하잖아요. 

링컨이 살던 그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아요. 일종의 지적 허세가 상류사회의 품위로 여겨지던 시대죠. 실제로 게티즈버그 현장에서 링컨보다 앞서 연설을 했던 에드워드 에버렛이란 사람이 그랬다고 합니다. 당대의 잘 나가던 정치가이자 명연설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현장에서 무려 두 시간짜리 연설을 했죠. 기록을 찾아보니 그때 연설문의 단어수가 무려 1만 3500개였네요. 감이 잘 안 오시죠? 저 정도의 단어 수는 글자로 꽉 채운 A4 용지 32페이지의 분량입니다. 그것도 폰트 크기 10으로 말이죠. 그 많은 단어가 적재적소에 필요한 내용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단어를 몇 번이고 꾸미는 수식어들과 문학‧비문학을 총동원하는 암시와 인용들, 역사적 혹은 정치적인 보충설명… 장장  두 시간이 넘는 말 잔치였어요. 같은 말을 있는 대로 늘려서 중언부언을 되풀이했죠. 그것이 바로 당시 연설의 미덕이었고요. 

하지만 링컨의 연설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단어 수가 딱 220개만 쓰였죠. 시간은 2분 남짓. 오죽하면 “당시 대통령 연설이 너무 짧게 끝나 사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웃지 못 할 해프닝까지 있었으니까요.

비록 짧지만 그만큼 굵었습니다. 문장은 깔끔했고, 연설은 강렬했으며, 메시지는 명료했죠.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신념을 바쳐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로 시작되는 첫 문장부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할 것입니다”라고 마무리되는 끝 문장까지 군더더기 없이 제 자리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죠. 덕분에 그 메시지는 그곳에 모인 1만 5000명의 사람들 모두에게 뾰족하게 박혔을 겁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든 적게 배운 사람이든 누구나 쉽고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chap 2. 좋은 글은 수용자중심으로 쓰여야 한다.

이쯤에서 필자의 경험이 오버랩됩니다. 사회생활 첫걸음을 여행 잡지의 기자로 시작했던 필자의 글이 딱 에드워드 에버렛 같았어요. 소위 멋을 잔뜩 부리는 글에 매몰돼있었죠. 사실 충분히 그럴 만했어요. 여행 매거진이라는 매체 특성이 소위 지적 허세를 유도하는 면이 있었으니까요. 같은 의미라도 화려한 수식어를 남발하고, 종속절을 잔뜩 이어가며 중언부언을 일삼고, 온갖 잡다한 지식을 끌어와 아는 척을 하기도 했죠. 당시 글을 보면, 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자성어가 그리도 많은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입니다. 

그러다 일간지로 옮기게 됐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더라고요. 엄청 혼나고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배웠어요. 글에 겉멋이 가득하다고요. 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알량한 자신감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문제는 누가 읽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어요. 보통 일간지에서는 중학교 2학년이 보는 수준으로 글을 쓰라고 하거든요. 신문이 대표적인 대중 매체인 만큼, 가독성의 허들을 최소한으로 잡는 거죠. 그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제로는 잘 안되더라고요. 어렵고 장황하고 멋스럽게 쓰려했던 습관이 너무 굳어져서 쉽게 써보려 하니 뭔가 어색하고, 내용 전개도 잘 안되고, 문장 흐름도 억지스러운 것 같았어요. 실제로 중학생 조카를 데려다 앉혀놓고, 읽어주며 “이해가 가느냐?”라고 묻기도 했을 정도였죠. 그 전에는 내 글을 읽는 사람, 즉 수용자에 대한 고민을 전혀 안 했던 거예요. 

사실 좋은 글이라는 건 상당해 애매한 표현이죠. 장르나 용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기준이 바뀌니까요. 상징과 은유로 점철된 시의 글줄과 팩트로만 밀도를 채워야 하는 보고서의 글이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세상 모든 글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좋음’의 기준이 딱 하나 있어요. 그것이 바로 ‘수용자 중심’의 글쓰기죠. 

앞서 소개한 게티즈버그 연설문 같은 게 대표적입니다. 불특정 다수의 국민 만여 명을 이해시키는 글쓰기는 쉽고 편해야 하죠. 간결하고 명료했던 링컨의 연설이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무조건 쉽고 간결하다고 좋은 글은 아니겠죠? 학회지나 논문의 글쓰기라면 보다 전문적이고 세밀하며 충분한 예시와 인용도 필요할 겁니다. 그걸 보는 수용자들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모든 글은 목적이 있고, 그에 맞는 대상도 있습니다. 그 대상에게 한껏 밀착해 눈높이를 맞추고 쓴 글이라면 그 만듦새와는 상관없이 통하는 글이 될 겁니다. 글의 제1목적인 ‘전달’은 충분히 성공하는 셈이죠. 그 목적이 학업이든 업무든, 심지어 연애편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댓글